달마 :: 아관파천은 무엇인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 있던 명성황후의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역시 미국 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의 실시를 권유하였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다.

또한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 공사 미우라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모 시해로 인해 고조되었던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초래하였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 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을 의미한다.  아관이란 러시아 공사관을 가리키고

 

러시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했기 때문에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 불렀다. 

 

파천이란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거처를 옮긴다는 뜻이다.

 

당시 고종이 신뢰하던 관리들은 궁궐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 관리들과 친러파 관리들이었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이윤용(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하였다.

 

고종이 매우 아꼈다는 엄상궁이 언급된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궁녀로 일한 엄상궁은

 

고종의 이관파천을 설계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인물이다. 훗날 고종의 아이를 임신하고

 

귀비에 오르기까지 했다.

 

기록에는 얼굴에 못생겼다고 나왔지만 이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끌만큼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고 알려졌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마자 고종은 다시 엄상궁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순헌황귀비가 바로 엄상궁이다.

 

고종은 덕수궁 환궁할 때까지 약1년 동안 공사관에서 생활했다. 비록 궁을 떠나 외국공사관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고종은 나랏일을 보았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이 제일 처음 한 일은 왕비 살해 사건에 가담한 친일파 대신들을 처단 한

 

일이였다. 당시 고종은 김홍집을 비롯해 유길준 어윤중 정병화를 내쫓았다. 조선 백성들이 극구

 

반대하는 단발령을 비롯한 개혁들을 취소하기도 했다.

 

아관파천 1년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탁지부 고문으로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예프는 탁지부대신처럼 행세하였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고종에게 있어 아관파천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의 삼림 채벌권을 얻었다.

 

고종은 즉시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 유길준 등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김홍집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동학봉기와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정상급의 개혁 관료였지만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명성황후 민씨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장성하여 대한제국 2대 황제를 지냈다. 한국민족문제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살아생전 청나라와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인한 혼란과 거듭되는 정변을 버텨야 했다. 또한 일상의 궁중 의례, 방문 인사들의 접견, 국왕에 대한 내조, 왕세자의 건강과 교육, 비명에 간 친정어머니와 오빠들의 운명, 자신의 건강 문제 등으로 노심초사하는 일상을 보냈다.

사후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정치가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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