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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목사 손정도그는누구인가?

출생

1882년 7월 26일, 평남 강서(江西)

 

사망

1931년 2월 19일

 

관련 사건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음모사건

 

본관

밀양(密陽)

 

주요활동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 ・ 의장, 1920년 의용단 활동 참여,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1922년 한국노병회 창설, 인성학교 교장, 1927년 농민호조사 결성

 

포상훈격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관련 인물/단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용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노병회, 농민보조사

 

생애

1882년 7월 26일 평남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건(浩乾)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88년 6살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며 관리의 길을 지망하였다. 1895년 13살 나이에 같은 동리 박용(朴鏞)의 맏딸이며 두 살 연상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박신일에게서 장녀 진실(眞實, 다른 이름은 원미(元美)), 차녀 성실(誠實), 장남 원일(元一), 차남 원태(元泰), 삼녀 인실(仁實)이 태어났다.

 

과거 포기와 기독교 개종

 

1902년 관리임용시험에 응시할 생각으로 평양으로 가는 도중 평양 교외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목사집에 유숙하며 그로부터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 교리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는 신학문에 대한 동경과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상투를 자르고 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도피와 중고교 재학

사당을 철거한 이 일로 그는 친족들에 의해 패륜으로 낙인찍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가 새벽에 그를 깨워 잠옷 바람으로 빼돌려 야간도주를 하게 되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를 통해 평양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받고 면담하였다.

문요한과의 상담 후 문요한은 그를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추천,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김형직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의 생부였다.

 

선교활동

 

아내 박신일도 평양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가정을 돌보았다. 졸업반이던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실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시험 부정행위, 절도, 속임수, 험담, 불평 등을 회개할때 참여하였다.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관리 지망생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9년 6월에 진남포와 삼화구역의 전도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신흥리교회 담임을 맡았다.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1910년 5월 서울 정동제일 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청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7월에 중국어를 익힐 목적에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가 신민회의 일원으로 파견된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신민회의 핵심 인원이었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와 소개를 주고 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서로 아우님, 형님 하는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

한국내 신앙운동

 

1911년 봄 감리교 연회에 참석차 귀국해, 그해 4월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한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에서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고,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신감을 가질 것을 역설하였다.

또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소식을 미국의 안창호에게 전하고 안창호와 조성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사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1년 6월 미감리교연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 3월에 귀국해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해 선교활동을 보고하였다. 이어 다시 ‘청국의 봉천 북방 하얼빈 남방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중국인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해 200여명의 교인을 얻었다.

 

모금과 강연, 설교와 노동 등을 통해 자력으로 비용을 마련해 이층예배당을 헌당했으며 한국인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교회가 한인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가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1912년 7월 하얼빈에서 이른바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모의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3개월간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이후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고, 11월에 ‘보안법조례위반’으로 1년 유배형을 받고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진도 주민들과 예배를 보고 성서를 가르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유배 1년만인 1913년 11월 석방되었다.

1914년 6월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1년간 시무하였는데 신도들이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15년 4월 현순 목사의 후임으로 정동제일교회로 발령을 받자 동대문교회 교인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이임을 극구 반대하는 등 교인들의 신임을 받았다.

새로 부임한 정동제일교회에는 주로 이화학당, 배재학당 학생들이 예배에 참여하였다. 시무하는 동안 10년 만에 엡윗청년회를 재조직하여 활성화시켰다.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갈라놓았던 휘장이 제거되었고,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는 등 한국 최고의 교회로 발전시켰다.

 

독립운동

1917년 협성신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18년 6월 23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병치료차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행동이었다.

1919년 초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사람으로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을 출석시키는 일을 돕고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였다. 또 하란사(河蘭史)를 시켜 손병희를 설득해 민족대표 33인에 참여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천도교의 경비 지원도 이끌어냈다.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던 그는 박신일사모가 낮에는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정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박신일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어 내는 일이었다 한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하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朱山月)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2월 3・1운동을 계획하던 중에 망명을 결행해 3월 1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신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등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한 후 베이징으로 가서 의친왕 이강공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에 참여했던 핵심인물들은 해석, 현순, 최창식 등 모두 감리교 목사들이었다. 이들의 암호명은 손정도는 입정(立丁), 현순은 석정(石丁), 최창식은 운정(雲丁)으로 입석정(立石丁)이었다.

그러나 하란사가 유행성 독감에 걸려 급사하는 변고가 생기면서 3월 26일 현순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왔다.

 

임시정부 참여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의 노출을 우려한 그는 각종위원회에 그 이름없이 참여하거나 가명, 익명으로 참여하였다. 자신의 신분노출이 조직의 활동에 장애가 될까 하여 익명으로 노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천도교인사들과도 접촉했던 그는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천도교로부터 1만원, 미국 선교부로부터 1만원을 얻어낸 것도 모두 해석의 일이었다.

 

1919년 4월 10・11일 양일간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한 회의장에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를 개최하였다.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 김철(金徹), 김구(金九), 윤현진(尹顯振), 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경찰 조직인 의용단(義勇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그해 2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에 현순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0년 중반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Central Conference of Eastern Asia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대한예수교회 진정서>를 발표하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선교사 수 십인을 접대했다. 비용은 해석이 국내로부터 모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음해로 공금 유용죄로 조사를 받게 되어 도산 안창호가 직접 조사하고 국내의 후원자까지 만나서 조사했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해석은 큰 상처를 입고 길림성의 목회를 지원하였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한국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렸으며, 동양평화의 관건은 ‘한국 독립’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총회에 함께 참가한 배형식목사로부터 건네 받은 1천여원의 자금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초빙해 한국의 정황을 알리고 독립운동 선전활동 등의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와 신뢰를 쌓았고 1920년 6월 10일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였다. 1920년 12월 29・30일 개최된 흥사단 원동대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이원익, 김병조, 김인전, 조상섭, 송병조, 장덕로 등 독립운동가인 기독교 목사들과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들은 중국 각 교회에 한국교회의 참상을 전했으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을 선전하고 특히 기독교인들로부터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동정과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10월에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설하고 열린 제1차 이사회에서 노공부장(勞工部長)에 선임되었다. 상하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이 되어 학교 운영을 맡기도 하였다.

 

만년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했으며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목회자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4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린(吉林)의 신첩(新帖)교회 목사로 부임이 결정되었다.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될 무렵,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다 황해도의 재산을 처리하며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내지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 등 고난의 길을 걸었으나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그 주변 대분, 대강자 교회, 더 나아가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두루 다니며 돌보았다. 이 무렵에 김일성과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지린 액목현교회 담임을 겸하여 지린 주변의 대분(大坌)과 대강자(大崗子) 교회를 순방하며 목회 활동을 펼쳤다. 설교를 통해 단결과 협력 ・ 도리 ・ 정직 ・ 애정 ・ 선 ・ 근면 등의 가치와 ‘독립에 대한 가능성 제시’를 비롯하여 ‘시련의 극복’, ‘과학적 사고의 제창’, ‘경험의 극대화’, ‘남의 탓 지양’ 등에 대해 설교하여 교일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또 중국 관청에 드나들며 한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줌으로써 교회는 한인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26년 길림교회에서 3・1운동 7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만주를 순회 중이던 안창호가 교회를 방문해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1927년 2월 안창호가 다시 지린 한인사회를 방문하였을 때 대동문 밖 최명식의 대동공사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4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지린성 교섭국 통역관인 오인화(吳仁華)와 함께 지린성 당국자는 물론 베이징에있는 장쉐량(張學良)측과 교섭을 진행해 20여일 만에 석방시켰다.

 

1927년 4월 1일에 ‘길림사건’의 현장인 대동공사에서 안창호를 비롯한 재만 한인 지도자들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재만 한인의 경제 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이상촌 건설 등을 목표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 같은 해 고향의 전 재산을 처분해 동생 손경도 명의로 경박호 일대 액목현 지역에 3천일경(120결) 정도의 땅을 매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하였다. 목릉(穆陵)에도 3천평의 농장을 개발했다고 한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연일 과로와 격무에 시달렸고 ‘가쓰라 암살모의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1930년 봄 이후에는 목회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1년 2월 베이징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지린으로 돌아온 후, 한 동포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액목현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동양의원에 입원했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2월 19일 밤 12시에 4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31년 2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베이징에서 온 아내 박신일과 친동생 손경도(孫敬道) 그리고 한인 40여 명이 참석했으며 일제의 경계 속에 조촐하게 치러졌다.

사망한 후 10개월이 지나도록 시신은 지린성 동문 밖 임시 장지에 봉안되었다가 9월에 이르러서야 지린성 북문 밖 북산(北山)에 유해를 안장했다. 1960년대 중국문화혁명 시기에 묘소가 파헤쳐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동생 경도가 미산(密山)에 마련한 묘소로 이장했고, 이후 조카 손원진이 묘소를 관리해 왔다. 1996년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9월 12일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남(첫째 아들) 손원일은 귀국, 대한민국 해군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삼녀(셋째 딸) 손인실과 셋째 사위 문병기는 미국으로 떠났고, 국내에서 사업을 하던 맏사위 윤치창도 1963년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손정도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에서의 존경

 

현재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의 은인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있다. 1926년무렵 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을 손정도 목사가 친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했다.그래서 북한에서는 2003년 10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같이 열어서,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였다

 

일화

 

김일성의 은인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친과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 장로와 김일성은 2살 차이였다.

 

김일성은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공안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해석은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며 그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경의 위협이 다가올 것이니 피하라고 권고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면 10년형을 살게 될 것을 면해 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해석을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1991년 5월 네브라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았고, 김일성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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